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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자기 소개 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지필묵을 가지고 현재의 풍경을 그려내는 것에 관심이 많은 작가 권세진입니다.

 

2. 동양화를 전공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8살이 되었을 때,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시골에서 살게 되었어요. 서실을 다닌것은 아니지만, 그때부터 할아버지께 한자와 서예를 배웠어요. 학교를 마치고 붓 글씨를 쓰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어요. 고등학교 진학 고민을 할 때쯤, 서예를 특기 삼아 작은할아버지가 예고 진학을 추천해주셔서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예고에서 서예 전공은 없었지만, 같은 재료를 사용하는 동양화로 진학하게 되었어요. 작은할아버지는 화가였는데, 서양화를 전공하시고 유화를 하셨지만 반대로 불교적인 작업을 하셨어요. 그런 의미로 동양화가 매력 있는 것 같다며 말씀해주셔서 전공하게 되었어요.

 

3. 동양화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작가님이 생각하는 매력/특징 등을 언급해주세요.)

동양화의 매력은 전통을 기반으로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범위가 넓다는 게 매력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전통 동양화의 그림을 볼수록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생활과 밀접한 부분도 있고 그림에서 반영되는 상상력이나 구도에 놀랄 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제가 전통에 대한 범주나 고정관념이 있지 않았냐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통적인 방식과 같은 그림을 그리기보다 현대에 방식을 접목 했을 때 재밌는 작업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이 들어요.

 

저는 종이라는 지지체가 매력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캔버스에 물감처럼 온전히 손의 움직임을 조절해서 그리는 느낌이 아닌, 먹을 머금은 붓이 종이에 닿으면서 번져나가는 점을 이용합니다. 이런 방식은 어느 정도 스스로 그려지는 느낌이 있거든요. 그 느낌이 저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오고, 약간의 변수를 즐기며 그리고 있습니다. 색채가 화려하게 단번에 다가오는 느낌보다 안료가 스며들면서 만들어 내는 깊이와 공간감을 좋아해요.

 

4. 현재까지 주로 어떤 작업을 해 오셨나요? (대표적인 시리즈 소개 그리고 그 시리즈를 관통하는 특징을 언급해 주면 좋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사진의 사용 등등 그리고 왜 본인은 그 부분에 관심을 갖는지 이유도 함께 언급해주세요)

 

1) 사진의 사용

저는 동양화의 소재가 되는 대상들이 지금도 계속 그려지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배웠던 동양화의 주제들은 초상, 산수, 전각, 문인화였고 임모(臨摸)를 통해서 체득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저는 전통적 도상을 그리기보다는 저를 둘러싼 주변의 풍경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동양화는 대상을 관찰한 후 생김새와 습성 등을 파악해 함축적으로 표현합니다. 하지만 현실의 대상들은 전통적인 필획의 방법으로는 쉽게 포착되지 않았고 전통의 필법과 준법은 산수화를 그리기에는 적합하지만, 그러한 필법으로 현대의 이미지를 다루는 것은, 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 이유로 순수한 이미지인 사진을 이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진의 사실성과 시간성을 동양화의 물성과 기법을 찾아가면서 재현의 방식을 적용하였습니다.

 

2. 흐려진 풍경 연작 (2013-2015)

박제된 시간(2013)은 한 장의 사진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유년기의 앨범을 보게 되었고 그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인물들의 얼굴을 보게 되었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는 존재들을 인식하면서 기억과 망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증명사진과 같은 구도의 인물들을 그리게 되었고 과거에는 존재하였으나 현재에는 기억에서 사라진 유령과 같은 인물들을 흐릿하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려진 인물의 얼굴 위로 여러 겹의 색으로 겹쳐 칠하고 다시 호분을 사용하여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작업하였습니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 겹과 두께를 시각적으로 드러내고 자 하였습니다.

유년기 앨범에 대한 작업 후 다음 작업은 흐려진 풍경(2014) 연작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무대가 된 초등학교는 제가 다녔던 곳으로, 당시에 그곳은 학생이 적어 분교였었고 제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폐교가 되었습니다. 이후 성인이 된 제게 유년기의 기억이 있는 시골의 마을과 학교를 생각하게 되었고, 유년기의 기억과 장소에 대한 상실감을 ‘그리기’라는 시도로 복원해 보고자 하는 생각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작업을 위해 경주에 있는 학교를 답사하였고 그곳에서 오래되고 낡은 계단의 모습과 페인트가 벗겨져 떨어지고 있는 천장 등 기억 속 장면과 뒤바뀐 풍경들을 통해 하나의 장소에 대한 현재와 과거 기억이 서로 충돌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의 장소의 서로 다른 시간의 풍경을 가지고 작업하였고, 전시 공간에서도 이러한 특징을 반영해서, 각자의 시간을 부유하는 잔상처럼 전달하고자 하였습니다.

흐려진 풍경의 작업을 하면서 유년기의 기억과 장소에 대한 상실감을 회복되었고, 과거와 기억의 대한 주제에서 현재와 일상의 풍경을 다루는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3)조각그림 (2017-)

귀로 연작(歸路 2017-2018)의 귀로는 되돌아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다시 돌아간다는 뜻이며 가야 할 곳이 존재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착안하여 지은 명제입니다. 10년 가까이 살아온 대구에서 서울이라는 도시에 오게 되면서 겪은 심리적 변화와 이방인과 같은 감정을 받게 된 것이 작업의 출발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감정을 바탕으로 바라보는 대상에 투사하여 풍경에 본인의 심리를 덧입히는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늦은 밤 작업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마주치는 장면들을 작업에 소재로 만들어 보고자 하였고, 생활과 그림을 구분 짓기보다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시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밤 풍경을 그리면서 무한대로 확장되는 밤의 공간을 종이에 먹으로 채워나가면서 먹을 하나의 색채로 인식하게 되었고 이는 화면에서 추상적 공간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주게 되었습니다.<밤의온도>(2018)라는 작품을 하게 되면서 수면(水面)이라는 대상에 성격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전에 작업했던 풍경은 실재하는 장소적 성격들이 강했다면 수면은 구체적이지만 위치적으로는 추상적인 모호한 대상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바다를 생각할 때 바다의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어떤 특정 나라나 지역을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바다와 같은 자연이라는 대상이 주는 모호한 장소성이 그림을 감상할 때 발생하는 선입견을 없애고 확장해서 생각할 수 있겠다는 부분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수면 작업을 이어나가다 보니 제가 사용하는 재료인 한지와 먹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을 하게 되었고 무언가를 그린다기보다는 먹을 칠하고 바르는 행위에 집중하게 되면서 물성에 흥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러 종류의 먹을 모으게 되었고 하나씩 사용해 보면서 먹의 번짐이나 먹색과 빛에 반사되는 정도들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먹의 색채는 일반적으로 검은색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자세히 보면 갈색빛을 보이는 종류가 있고 반대로 푸른색, 회색의 색채가 있습니다. 광택감도 서로 다른 정도의 빛을 반사합니다. 수면 연작은 바다를 재현함과 동시에 먹을 실험하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지라는 특성을 반영하여 얇게 비치는 종이의 질감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그 방법으로 작업한 후에 배접하지 않고 전시공간의 벽에 설치하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관람객이 그림 앞을 지나가면 움직임에 의해 종이들이 조금씩 반응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는 전통적인 방식 중 하나인 배채법을 응용하여 캔버스에 채색하고 배접을 하여 종이의 뒷면에서 색채가 은은하게 비치는 방식을 실험해 보았습니다.

 

4) CMYK (2021-)

동양문화에는 탁본(拓本)이라는 형식이 있습니다. CMYK 작업은 동양문화의 탁본이라는 방식을 차용하여 이미지를 탁본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하게 된 작업입니다. 전통적인 탁본은 비석이나 목판에 새겨진 서체를 보존하거나, 기록하려는 목적으로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제 작업에서는 개인적이고 사소한 이유로 그려집니다. 저는 일상에서 만나는 아름답다고 느낀 순간이나 기록해 놓고 잊고 싶지 않은 순간들을 사진을 찍듯이 종이에 새긴다는 생각으로 작업하였습니다.

대상을 옮기는 과정에서 톤과 색채를 미세하게 조정해나갑니다. 그 위에 색채를 가미하여 흑연의 입자들이 지워지지 않도록 채색으로 마무리하였습니다. 오래된 이미지에서 느껴지는 시간의 누적과 빛바랜 낡음을 회화로 흉내 냅니다. 종이는 시간을 담는 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붓질의 반복과 번짐으로 인해 선명했던 이미지는 불분명해지고 흐려지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평범한 일상의 풍경은 향수가 느껴지는 이미지로 전환됩니다.

 

5) 이동시점

이동시점은 우리가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것에 대한 결과물입니다. 저는 주로 인간이 바라오는 시야의 화각과 비슷한 범위의 카메라 렌즈를 사용합니다. 이는 제가 대상을 바라보는 느낌이 이어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동안 작업의 소재가 도시나, 수면을 그렸을 때와는 다르게, 등산을 하며 보게 되는 자연의 풍경들은 무척이나 거대했습니다. 이러한 자연의 풍경은 하나의 시선으로 담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대상을 바라보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천천히 대상을 관찰하며 초점을 바꿔가면서 종합적으로 풍경을 인식하는 것을 느꼈고, 그 속에서 어떤 부분이 강조되기도 하고 생략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요소를 작업에 반영하면 어떨까 고민하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작품의 대상이 된 공간에 서서 이동하면서 전체가 아닌 부분을 촬영했습니다. 그 부분들을 조합하면서 전체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작업하기 시작합니다. 부분들은 서로 조금 맞지 않을 수도 있고, 각 장면들이 서로 다른 촬영 조건을 지니기 때문에, 명암이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물이나 대상을 바라볼 때 완벽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것에 집중하듯, 이러한 오차들도 작업에 반영해서 그리고 있습니다.

 

5. <Distance> 전시의 주제는 무엇인가요? (전시명의 이유도 궁금해요.)

 

이번 전시에서는 제 작업에서 항상 유지가 되는 어떤 거리에 대해 보여주는 전시를 생각하였습니다. 전시명인 <Distance>(거리)는 작품 내부의 공통적인 거리와 서로 다른 거리가 있습니다. 공통적인 거리는 모두 대상과 작품 사이에 사진이 만들어 내는 얇은 막을 의미합니다. 차이점으로는 광할한 자연과 다층의 레이어가 만드는 거리(이동시점), 깊숙한 곳에서 다가오는 화면 속 공간감(파도), 기억의 발화로 인한 변화하는 심리적 거리(트로피)을 의미합니다. 전시의 제목을 <거리감각>이나 <대상과의 거리> 등 앞에 수식어를 붙이는 것도 생각하였으나 설명적으로 치우치고 생각할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되는 느낌이 들어 <Distance>로 지어 거리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할 수 있는 방향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의 작업에서 느껴지는 공통적인 <Distance>(거리)에 의미에 대해 말해 보겠습니다.

이번 전시는 대상과 그림 사이에 사진이라는 중간의 매개가 만들어 내는 어떤 막(膜) 같은, 거리감을 보여주는 전시를 만들어 보자 생각했어요. 먼저 대상을 바라보면서 촬영을 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후에 다시 봤을 때 흥미가 가는 장면도 있고, 처음에는 흥미로웠는데, 이후에는 그려지지 않는 장면도 있어서 촬영한 사진들을 보면서 다시 기억하고 반복적으로 관찰한 후에 그려집니다. 이처럼 작업에서 사진은 하나의 시간을 만들어 주면서 거리감을 생성한다고 보았습니다.

일반적으로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방식은 대상을 눈으로 봄과 동시에 화면에 그려진다던가, 구성과 상상을 통해 그려집니다. 화폭에 구도를 잡아나가면서 대상을 그리는 순서가 생긴다거나 볼륨을 표현하기 위해서 여러 움직임의 붓질을 표현하게 됩니다.

그와는 다르게, 사진을 모사하듯 그리는 저의 작업은 스케치 된 형태 위에 맞는 톤과 색채를 마킹하듯, 칠해 나갑니다. 예를 들어 바다를 그린 작품을 볼 때,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사실적인 바다와 파도의 움직임을 주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먹의 단계를 칠해놓은 단순한 느낌으로도 보입니다. 이처럼 대상과 그림 사이의 사진의 과정이 일정한 거리감을 생성한다고 생각이 들었고, 이것을 주제로 한 전시를 보여주기로 하였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사진을 회화에 이용하는 여러 화가들(Chuck close, Luc tuymans, Gerhard richter)의 작품을 보면서 일종의 거리감이 생성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막과 같은 거리감이 사진을 회화로 전환하는 작가가 고안한 하나의 필터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대상과 저와 연결된, 감정의 선을 단절하는 장치입니다. 그리드를 그리고, 그 안에서 비워진 칸을 채워나가는 방식으로 그려지는데요, 이 과정에서 대상의 서사가 단절된 채 빈칸을 채워나가듯 무심히 그려지기 때문에, 사진처럼 보일 수 있게 됩니다. 또한, 기계적인 차가운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어떠한 이미지를 주어도 작가의 작업방식을 거치면, 그 작가의 개성적인 화면이 만들어지듯, 작가는 자신이 고안한 필터를 통해 소재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이미지를 작업에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제가 대상에 대한 해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닌 관객이 해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유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번째는 그려지는 대상과 물리적인 거리에 있습니다. 최근의 경향이 점점 더 화면에서 담아내고 싶은 풍경의 범위가 더 넓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초기에 작업했던 트로피 같은 경우 실제로는 작은 크기이지만 가까이서 본 시점이라면 바다에서는 좀 더 넓어지고 이동시점 같은 경우는 그동안 그리지 않은 광각의 넓은 화면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점점 변화하는 저와 대상 사이에 변화하는 거리에 대해서도 보여주는 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6. 이번 전시에서는 3점의 작품만을 전시하는 데 그 이유가 있나요? (저희가 생각하기엔 각 시리즈를 대표하는 작품들이기도 하고 쉽게 접할 수 없는 대형의 작품이기도 하고, 작가님이 생각하기에 전시작 3점이 함께 전시되는 당위성이 무엇인지 언급해 주면 좋을 것 같아요.)

 

전시가 되는 세 점의 작품들은 각각의 작품이 어떤 <Distance>(거리)의 요소에 해당합니다. 세 점 모두 공통적으로는 위에서 언급한 사진을 매개로 한 얇은 막과 같은 거리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업의 초기부터 현재까지의 작업 가운데 거리의 요소가 조금씩 다르게 표현된 대표적인 작업으로 세 점을 선정하였습니다. 초기작인 트로피와 바다, 다중시점까지 세 작품 조금씩 다른 소재와 형식들이지만, 내부적으로 작동하는 <Distance>(거리)라는 주제 요소를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 점 모두 시기를 대표하는 기념비와 같은 작품들로서 전시 공간에서 각각의 시간을 잘 점유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트로피는 심리적 거리를 말합니다. 누구나 오래된 사진이나 사물을 보았을 때, 하나의 매개가 되어 불현듯 떠오르는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현재의 나와는 상관없이 멀게 느껴지던 것이 기억으로 친밀해지는 것을 하나의 거리로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요소는 초기에 기억을 대해 다루는 작업에 있는 특징이기에 기억의 매개가 된 트로피 작업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수면 연작은 여러 점을 그린 연작이기도 합니다. 수면 연작의 작품들은 주로 잔잔한 바다의 윤슬들이 반짝이는 평온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반대로 <바다를 구성하는 741개의 조각>은 수면 연작중에서 움직이는 운동성이 느껴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작품들의 경우 빛의 반짝임을 표현한 것이라면 이 작품은 상단 깊숙한 곳에서부터 해변 아래 발밑까지 밀려오는 파도의 움직임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 때문에 다른 수면의 정적인 분위기 보다 반복해서 움직이는 파도의 동적인 느낌이 있고, 그로 인해 깊숙한 곳에서 평평한 곳 까지의 거리감을 잘 드러내는 작품으로 선정하였습니다.

 

다중시점은 그간 작업했던 장면들이 단일한 하나의 시점으로 눈과 비슷한 범위의 시야를 지녔다면 다중시점은 넓은 하나의 시선으로 볼 수 없는 광각의 풍경을 보여줍니다. 산의 정상에서 촬영한 풍경으로 한 눈에 들어올 수 없는 풍경을 이동하면서 하나의 풍경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의 풍경으로 만들기 위해 생성되는 화면의 겹쳐진 다층의 레이어들은 전작들에 비해 깊이감과 거리감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7. 각 작품을 설명해주세요. (작품마다의 작업계기, 기법, 주제 등을 각 1-2문단 정도로 적어주세요.)

 

1) 트로피

트로피는 작업 초기의 기억에 관한 작업을 시작하게 만든 사물이었다. 오랜만에 부모님의 집에 가게 되었다. 나의 방 서랍에서 투명한 유리로 된 케이스에 먼지가 쌓인 트로피가 눈에 들어왔다. 이것을 바라보면서 처음에는 언제 받은 것인지 무엇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 이후로 잊혀진 기억과 지나온 시간을 생각해 보게 되었고, 유년기의 앨범을 찾아보게 되면서 기이하고 낯선 느낌을 받았다. 이후에 트로피는 작업에서 나의 작업에서 하나의 상징물이 되었다. 현재는 폐교가 되어버린 학교의 상실된 공간을 그림으로 복원해 보자는 것이 나의 첫 개인전이었다. 그때 이 트로피를 작업하게 되었다. 실제로는 30cm 정도의 크기이지만 과거 장소에 대한 기억의 상징물로서 거대한 기념비로 작업하기로 마음먹었다. 전시 공간은 천정이 굉장히 높은 구조였는데, 지면에서 바닥까지 높이를 재고 거기에 맞춰 제작된 것이었다.

작업은 수묵담채의 물성으로 탈색된 듯한 빛바랜 색채와 얇고 투명한 질감을 보인다. 안료를 묽게 개어서 종이에 반복해 겹쳐 칠하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나갔다. 이러한 질감의 느낌이 기억의 느낌과 유사하다 싶었고 점과 점을 겹쳐 칠하면서 그려지는 방식들이 지나온 시간을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시 공간에서 풍경과 이미지의 하나의 시점만이 그려진 것이 아니라 과거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뒤섞어 전시하였다. 나에게 시간은 과거에서부터 현재, 미래 순차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닌, 우연한 어떤 자극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과거로 이동할 수 있는 기억이 속성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작업은 전시공간에 수평적으로 걸리는 방식이 아닌 전시공간의 높거나 낮은, 구석이나 모서리 등에 배치하여 저마다의 이미지가 각자의 시간을 지닌 사물들처럼 보이고자 설치하였다.

 

2) <바다를 구성하는 741개의 드로잉>

겨울, 부산의 해운대를 가게 되었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멀리서 조금씩 밀려오는 파도의 움직임과 물결을 관찰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수면에 비치는 윤슬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준다. 윤슬을 묘사한 작품이 정적이고 고요한 느낌을 준다면 이 작품은 밀려오는 파도의 움직임으로 동적인 느낌을 준다. 회화는 사실 고정된 하나의 장면이지만, 이 장면이 내게는 움직이고 있는 일련의 흐름을 보여주는 이미지라고 생각했다. 잔잔히 파도를 일으켜 내게 다가와서, 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일련의 과정은 삶과 죽음의 순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작품은 바다를 3등분 분할 한 삼면화 방식을 띤다. 세로로 긴 삼면화의 방식이 이미지를 더욱 생동감 있게 느끼도록 해준다고 생각했다. 하나의 화면으로 보는 감각과 세 개로 나누어져 보는 감각은 다르다고 생각하였고, 분할 한 이미지들이 개별로 독립적으로 걸었을 때, 그림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이것은 바다와 물의 이미지라서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 개로 분할된 화면은 독립적이기도 하고, 하나로도 보이면서 각각이 주는 차이를 발생시키고 싶었다.

 

3) 이동시점

2017년 이후로 일상의 풍경과 거주하는 도시를 기록하는 작업을 해왔었다. 바다의 수면을 작업하게 되면서 도시에서 자연으로 대상에 대한 관심이 옮겨갔다. 그로인해 바라보는 풍경의 거리감과 시야가 넓어졌다. 산의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의 면적은 하나의 시점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크기의 풍경이었다. 이동시점 작업은 이러한 생각들이 모여 되어 제작된 것이다.

이동시점은 21년 올랐던, 제주의 ‘성산일출봉’을 삼원법적 구성으로 적용하여 작업해 본 것이다. 산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의 시점을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하여 나누어 촬영하였다. 아래로 보이는 초원의 풍경과 멀리 평평하게 보이는 수평의 바다, 그리고 맑은 하늘이 보이는 시점이 되었다. 이동하면서 사진의 높낮이를 바꾸며 촬영을 했다. 작업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부분들의 결합이 필요했다. 하나의 풍경이 될 부분들의 이미지는 27장이었다. 27장의 출력된 사진들은 서로 다른 초점으로, 조금씩 어긋나거나 왜곡되거나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의 장면으로 재조합되었다. 이미지들은 시간의 단차가 존재하기 때문의 빛의 노출이나 명암이 조금씩 차이가 났고, 콜라주를 하면서 외곽의 형태들은 조금씩 부딪히고 충돌하며 오류를 만들어 냈다. 그 때문에 화면에서는 빛의 밝기로 날아가버린 부분도 존재하고 형상들이 조금씩 부딪히기도 한다. 이동시점은 그간의 단일한 하나의 이미지와는 별개로 이미지들마다 상이한 시점과 초점을 작업방식에 적용함으로서, 풍경을 바라보고 인지하는 실제 우리의 눈의 방식을 반영하고자 하였다.

 

 

8. 이번 전시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나 관람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전시의 포인트는 무엇인가요? (관람객들이 이부분을 알아봐줬으면 한다거나, 작품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해젔으면 좋겠다거나.)

먼저 큰 크기의 그림이다 보니 세 점이 공간에 걸리면서 느껴지는 힘의 긴장감을 느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번 전시를 구성하는 작품들이 하나로 연결된 연작들이 아니다 보니 관객들이 어떤 개연성과 이유를 궁금할 것 같기도 합니다. 선정된 작품들이 외부의 시각적인 요소로 선택된 것이 아닌 내부의 요소로 선택된 작품일이기 때문에, 보이는 이미지에 집중하기보다, 내부의 작용하는 형식의 변화나 전시의 주제인 <Distance>(거리)에 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싶습니다.

작품 내부에는 공통적인 거리와 서로 다른 거리가 있는데요. 공통적인 거리는 모두 대상과 작품 사이에 사진이 만들어 내는 얇은 막 같은 거리감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세 점의 작품들이 지닌 각각의 차이점으로는 광할한 자연과 다층의 레이어가 만드는 거리(이동시점), 깊숙한 곳에서 다가오는 화면 속 공간감(파도), 기억의 발화로 인한 변화하는 심리적 거리(트로피)가 있습니다. 이 차이들을 비교하고 느껴보는 경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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